1월6일은 교회력으로 주현절(Epiphany)이라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 주심을 기념하는 날인데, 서방교회에서는 특히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일을 기념합니다. 이전에 한 교회의 주현절 배너에 “Pursue something greater... like the Magi”(동방박사들처럼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하라!)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도 모르는 이방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자신의 욕심과 개인적 소망을 추구하며 살기 급급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들입니다. 그런 동방박사들이 왜 굳이 메시야를 찾아 멀고 힘든 여행길에 나섰을까요? 그들이 생존과 안정의 욕구를 뛰어넘는 더 높고 위대한 것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떤 더 높은 목표를 품고 추구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말씀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해서 그들을 움직여 갑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만남을 주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 만나주신다고 서운해 하기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숨바꼭질을 한다면, 숨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그 분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먼저 불러주셔야만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능숙한 어부가 그물망을 좁혀오는 것처럼, 주님은 주도면밀하게 베드로를 낚아(?)주십니다.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시고, 그의 배를 사용하도록 먼저 요청하시고, 그 배에 올라 말씀을 들려주시고, 전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해 낙심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의 상황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다가가, 결국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얻어냅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세대를 이어간다는 말이 요원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을 보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 합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그대로 답습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은혜의 유산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아들의 모습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일이 아닐까 염려 됩니다. 어쩌다 이스라엘의 ‘큰 용사’였던 기드온에게서 아비멜렉 같은 세대가 나왔을까요? 우리는 이 일을 교훈 삼아 어떻게 지혜롭게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할까요? 먼저, 우리 세대의 잘못이 다음 세대로 되물림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아들에게 물려준 악한 유산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을 넘어선 자기확신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전쟁에서 300명의 적은 숫자로 대승을 거둔 후 지나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두 왕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버젓이 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과 자기 확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지키지만, 자기 확신은 쉽게 그 선을 넘어
이전 대통령의 한 발언이 언론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고 했던 표현입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사용하기 과연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오늘날 이런 식의 ‘뉴에이지적 영성’ 또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대중서적과 자기계발서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흥미롭게도오늘 드보라의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별들이 하늘에서 시스라와 맞서 싸웠고,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다는 표현입니다(20-21). 드보라는 이 구절에서 이 전쟁의 영적 차원을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을 도운 것일까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던 이유는 드보라와 바락이 20년간 그들을 압제하던 가나안의 압제자 야빈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나서서 돕는 사람들은 간절히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을 온 우주와 천군천사들이 돕습니다. 그것이 하나
크리스마스 시즌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대강절(Advent)로 지키며, 왕이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과 13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약속하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귀환을 준비하도록 권면합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 바울은 그가 돌아올 때 교회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유순하고 겸손한 태도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대적자들에게는 바울이 약하고 권위가 없다고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고, 일부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권세를 다 쓰지 않고 온유하고 희생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때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을 엄중히 다루고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도의 다시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그 분은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오래 전 페이스북에서 디즈니 청소 노동자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디즈니는 야간 주간 청소 스텝들을 단순히 ‘청소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디즈니의 모든 쇼를 연출하는 최고의 ‘무대 연출가’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디즈니를 찾는 고객들의 행복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하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도 세심하게 청소 하고,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주변을 깨끗이 치워주고 새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어 아이의 미소를 되찾아주는 역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오늘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을 짓는 사람들도 자신의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를 알고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장인들, 실을 뽑고 성막의 여러 재료를 만든 “마음이 슬기로운” 이름 없는 여인들, 귀한 보석과 재료들을 기쁨으로 드린 족장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성경이 인류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인물들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모세나
Exodus Now and Then( 9) :구원의 식탁, 구원의 이야기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8.15광복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듯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만에 이집트를 탈출해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의 고된 노역도, 생존을 위협하는 파라오의 압제와 공포정치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민으로서, 자신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백성으로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식탁 자리입니다. 그 식탁 자리에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줍니다. 매년 돌아오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구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형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숱한 민족적 고난을 견디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월절 이야기의 절정은 바로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첫 유월절 만찬이 시작된 그날 밤, 이집트에 죽음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사자를 보내이집트의
Exodus Now and Then(8): 강자와 약자 인간은 누구나 상처와 연약함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상처와 열등감으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지냅니다. 또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온갖 가면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급급합니다. 모세 역시 젊은 시절의 실패와 상처로 내면에 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의 도망자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름 받았지만 여전히 상처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파라오 앞에 서는 것이 두렵고 말재주가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하나님은 아론을 붙여주셔서 약점을 보완하게 하시고, 함께 말씀을 받아 사명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열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모세가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세 번의 재앙은 모세와 아론이 함께 일으켰고,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의 직접적 역할이 점점 많아집니다. 일곱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의 지팡이가 이적을 일으키고, 여덟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가 지팡이도 필요 없이 하늘
Exodus Now & Then (7): Your God is too small!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겨우 내가 급할 때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 그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 정도는 아닌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작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하나님은 마법 램프의 요정 지니(Gini) 같은 그 정도의 존재가아닙니다. 교회 안에만 갇혀 있고, 종교 영역에서만 힘 좀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과학, 경제, 예술, 정치, 사회과학에서는 전혀 힘 못 쓰는 그런 작은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고, 하나님의 영역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축소시킵니다. 종교에서의 하나님, 나에게 심리적 위안과 평안을 주는 하나님은 믿지만, 학교와전공 속에서, 직장에서, 일터와 사회생활에서, 국제정치와 외교 부분에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런 공적인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있는 것 같지만, 당장 교회 문 앞 열발자국만 나가도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살아갑니다. 어디가서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티내다가 나만 왕따 당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둑’이 무너져 급속도로 나라가 기우는 시점이 보입니다. 바로 여로보암 2세 이후, 스가랴가 왕이 된 때입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왕들이 연거푸 모반을 당해 죽고, 짧은 시기에 왕조가 바뀌고, 외부 침략이 거세지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합니다. 이 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주었던 ‘은혜의 둑’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첫 번째 은혜의 둑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예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 은혜의 둑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켜준 최고의 방어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죽고, 예후 왕조가 4대간 이어지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여로보암 2세로 유효기간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 줄 ‘은혜의 둑’이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은혜의 둑을 다시 쌓아야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중흥기 때에 하나님이 아모스, 호세아, 요나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경고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