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의 락그룹 U2의 리더 보노(Bono)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크리스천 신앙을 밝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인들의‘위선적’인 모습을 자주 비난합니다. 언젠가 보노가 신학자 유진 피터슨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노의 질문이, 왜 오늘날 교회가 부르는 노래들은 시편의 기도들처럼 진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수많은 애가와 탄식과, 절망의 노래들이 가득한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애가를 찾아보기도 어렵고, 현실에 대한 치열하고 정직한 고민이 담긴 노래를 듣기 어렵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절망의 노래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이 정의와 공의가 없어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는 것 같고,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정직과 성실과 정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이 도리어 손해를 보고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어긋날 대로 어긋나 있습니다. 곰 같이 부르짖고 비둘기 같이 울면서 회복을 바라보지만 곪아져버린 내부에서 회복의 힘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이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일까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믿음일까요? 소위, ‘응답받는 믿음’,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하나님은 선하게 응답하시고, 불가능도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도 하인의 병이 낫는 ‘응답’을 분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에 감동하시고, 놀라워하시며, 크게 칭찬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에 호의적이었고, 상당한 물질적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장로들은 ‘ 이 사람은 다른 이방인들하고 다릅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받기 합당합니다‘라고 천거합니다. 하지만 백부장 자신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주님을 감히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며 주님의 방문을
언젠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이 ‘가벼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오래 동안 컨설팅 관련 분야에서 승승장구 해왔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의 강의와 조언에 감동을 받아 인생의 길을 새롭게 찾고, 수많은 조직들이 획기적인 전략수정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좌절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니, 약간은 의외였습니다. 더구나 그 분은 신앙심이 정말 깊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우울증 같은 건 모르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시편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도 한 때 모든 일이 형통하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깊은 수렁에 빠졌고, 영혼이 ‘죽음의 감옥’에 갇힌 듯한 어둠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과정 속에서 주옥같이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5,6)”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고통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만남을 주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 만나주신다고 서운해 하기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숨바꼭질을 한다면, 숨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그 분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먼저 불러주셔야만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능숙한 어부가 그물망을 좁혀오는 것처럼, 주님은 주도면밀하게 베드로를 낚아(?)주십니다.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시고, 그의 배를 사용하도록 먼저 요청하시고, 그 배에 올라 말씀을 들려주시고, 전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해 낙심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의 상황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다가가, 결국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얻어냅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세대를 이어간다는 말이 요원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을 보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 합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그대로 답습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은혜의 유산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아들의 모습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일이 아닐까 염려 됩니다. 어쩌다 이스라엘의 ‘큰 용사’였던 기드온에게서 아비멜렉 같은 세대가 나왔을까요? 우리는 이 일을 교훈 삼아 어떻게 지혜롭게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할까요? 먼저, 우리 세대의 잘못이 다음 세대로 되물림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아들에게 물려준 악한 유산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을 넘어선 자기확신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전쟁에서 300명의 적은 숫자로 대승을 거둔 후 지나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두 왕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버젓이 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과 자기 확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지키지만, 자기 확신은 쉽게 그 선을 넘어
이전 대통령의 한 발언이 언론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고 했던 표현입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사용하기 과연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오늘날 이런 식의 ‘뉴에이지적 영성’ 또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대중서적과 자기계발서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흥미롭게도오늘 드보라의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별들이 하늘에서 시스라와 맞서 싸웠고,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다는 표현입니다(20-21). 드보라는 이 구절에서 이 전쟁의 영적 차원을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을 도운 것일까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던 이유는 드보라와 바락이 20년간 그들을 압제하던 가나안의 압제자 야빈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나서서 돕는 사람들은 간절히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을 온 우주와 천군천사들이 돕습니다. 그것이 하나
크리스마스 시즌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대강절(Advent)로 지키며, 왕이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과 13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약속하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귀환을 준비하도록 권면합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 바울은 그가 돌아올 때 교회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유순하고 겸손한 태도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대적자들에게는 바울이 약하고 권위가 없다고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고, 일부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권세를 다 쓰지 않고 온유하고 희생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때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을 엄중히 다루고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도의 다시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그 분은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둑’이 무너져 급속도로 나라가 기우는 시점이 보입니다. 바로 여로보암 2세 이후, 스가랴가 왕이 된 때입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왕들이 연거푸 모반을 당해 죽고, 짧은 시기에 왕조가 바뀌고, 외부 침략이 거세지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합니다. 이 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주었던 ‘은혜의 둑’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첫 번째 은혜의 둑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예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 은혜의 둑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켜준 최고의 방어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죽고, 예후 왕조가 4대간 이어지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여로보암 2세로 유효기간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 줄 ‘은혜의 둑’이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은혜의 둑을 다시 쌓아야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중흥기 때에 하나님이 아모스, 호세아, 요나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경고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굳
열왕기서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단연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에, 그토록 위대한 선지자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단 한 번도 다윗과 견줄만한 선한 왕의 통치가 없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마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후, 여로보암 2세 시대 북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한 중흥기를 맞이한 것은 그 이전 엘리야와 엘리사가 일으킨 영적 부흥의 열매입니다. 엘리사가 죽을 때, 요아스가 울면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한 것은 참으로 진실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살아있는 동안에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버렸을 때, 시체가 회생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영적으로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던져 버리기를 즐겨 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엘리사와 같은 인물이 존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지난 15년 정도 청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낙심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가르쳐도, 잠간 돌아서면 배신하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 자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렇게 열매도 별로 보이지 않는 일에 제 인생을 허비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확실한”(?) 응답을 안 주십니다. 아니, 제가 기대하는 “강한 바람 같고 지진 같고 불같은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미한 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세워 이스라엘의 영적인 암흑기를 뚫고 나갈 믿음의 세대를 일으킨 것처럼,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일을 지속하라”는 그 음성 말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중에 하나님께 세 가지 사명을 받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자신의 선지자직을 계승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자신의 시대에 엘리사를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