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따라 중국에서 3년 남짓 생활하면서 처음 정착을 위해 중국어를 배울 때 일입니다. 대학교 어학원 과정이라 외국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서툴더라도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옆에 앉은 짝이랑 여느 때처럼 “오늘 아침 먹었니?”라는 일상적인 대화부터 “중국어 중에서 어떤 부분이 공부하기 어렵니?”에 이르는 고난이도(?) 질문까지 아는 문장을 총동원해서 물어보며 답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너는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훅 치고 들어온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으니 특별한 목적이 있겠거니 짐작하고 ‘중국어 코스를 마친 후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묻는 의미였을 텐데, 지레 찔려 혼란스러웠습니다. 나이 들면서 스스로에게조차 묻지 않았던 질문을 진지하게 해준 그 외국인 친구의 천진난만함이 고마웠고,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걸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잊어버렸던 질문을 다시 끄집어 낼 계기가 있었습니다. 제럴드 L. 싯처의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재로 가을학기 소울케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직업과 소명이 어떻게 다른지, 인생의 소명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소명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첫 번째 질문인 “너의 소명이 뭐니?”라는 질문 앞에서 막혔습니다. 소명이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소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책임감이 참 무거웠습니다. 덥석 물면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가 주어질까봐 두렵기도 했습니다. 재능으로 따져 봐도 참 초라했습니다. 작아지는 마음을 붙잡고 기도하는데 소명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내게 ‘재능’보다는 ‘순종’을 원하시겠구나 싶었습니다.
‘소명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며 모든 소명은 독특한 것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보통 사람이든 특출한 사람이든, 가난에 짓눌린 사람이든 배부른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순종하는 것은 만인을 향한 그 분의 부르심이다.’
예전에 아이에게 설거지를 시킨 후 제가 오히려 바빠진 적이 있습니다. 기름 묻은 접시를 따로 빼놓고 부피가 큰 냄비는 미리 씻어놓고, 다른 접시들도 애벌 설거지로 그릇을 씻어 엎기만 하면 끝낼 수 있도록 해놓은 후 “○○아! 설거지해!” 불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설거지 끝난 다음에도 뒤처리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위한 준비와 뒤처리까지 하느라 바빴지만 아이가 군소리하지 하지 않고 ‘예’ 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너무나 기특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도 내가 ‘예’라고 순종할 때 얼마나 기쁘실까, 그동안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시고 ‘예’라는 대답만 하라고 하셨는데 내 고집을 피우며 하기 싫어할 때가 많았구나. 요즘도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순종하기 보다는 “싫은데요. 왜 꼭 그래야만 하나요?”를 물어보며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사투를 벌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기도합니다. “너무나 연약한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소명을 내 중심, 세상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삶의 여정 속에 심어주신 소명의 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한걸음씩 걸어가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