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야망이 컸던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더 대왕을 꼽을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불과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그리스반도 북쪽의 작은 나라였던 마게도니아를 순식간에 세계 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 2세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한 야망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왕자 시절 얼마나 야망이 가득했는지, ‘내가 이루어야 할 업적을 아버지가 다 차지해버린다’면서 아버지의 승전소식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정복자요, 야망의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야망을 품은 정복자이자 왕을 소개합니다.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입니다. 알렉산더가 지칠 줄 모르는 야망으로 자신의 제국을 넓혀갔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불타는 열망을 품고 적들을 정복해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알렉산더의 나라와 너무나 달랐고, 예수님이 품으신 욕망은 알렉산더의 정복욕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정복하려는 욕망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셨습니다.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다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눅5:14) 우리 시대는 이미지와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속이야 어떻듯,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 온통 승부를 거는 것이 기업들의 마켓팅 전략일 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와 성도들도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포장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습니다. 성공하고 주목받는 교회, 남들에게 대단하게 보이는 유명인일수록 이런 유혹은 더 커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날의 이미지 메이킹이나 마켓팅 전략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병고침 받은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예수님을 선전하거나 마켓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예수님은 인기나 이미지 관리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떠들썩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방식보다 겸손하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이 ‘병고침과 기적’등 눈에 보이는 것만 주목하고 열광하면서,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눅 5:12-13) 미국에는 추수감사절이 끝난 다음 날,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광란의 쇼핑 데이가 있습니다. 모든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대대적인 세일행사를 시작하는 날인데요,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평소 갖고 싶던 물건을 싸게 사려고 새벽부터 상점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제가 아는 한 친구도 **마트에서 노트북을 파격세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밤새 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서 터치다운을 해서 그 노트북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열망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아닌, 쇼핑몰과 백화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나병환자는 큰 기대와 열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치
성경 읽기 : 마 8:23-27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이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건강하시던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큰 병으로 쓰러지시기도 하고, 잘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위기를 만나 몰락하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이 모든 희망을 잃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장애나 난치병을 앓는 자녀로 인해 눈물과 시름이 그칠 날 없는 가정도 있습니다. 대학만 진학하면 모든 것이 평온할 것 같았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 관계의 어려움, 불투명한 진로에 대한 고민, 크고 작은 학내 폭력과 갈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세상은 결코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폭풍을 만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항해에 나섰지만, 갑작스런 폭풍을 만났습니다. 놀란 제자들이 혼돈과 공포로 비명을 지를 때, 예수님은 배 한 켠에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 원망스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성경 읽기 : 마7:15-23 세상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 많습니다. 쉬운 예가 명품과 짝퉁입니다. 명품은 디자이너들의 고도의 창의성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예술적 감각에다 장인들의 노련한 기술력과 한땀 한땀까지 쏟아부는 세심한 정성이 합쳐져 만들어집니다. 명품을 사는 이유는 그런 창의성과 장인정신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짝퉁은 남의 아이디어를 베껴서, 최대한 단기간에 비슷한 상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명품에 베어진 진짜 가치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짝퉁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과정이야 어땠든 결과만 비슷하면 되고, 겉모습만 그럴듯하면 된다는 것 아닐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명품과 짝퉁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참 신자와 거짓 신자,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은 말로 회중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말만 들어서는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지도자가 돈이나, 성적인
성경읽기 : 마6:9-13 기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으실까?’라는 의문과 두려움입니다. 기도해도 안 들어 주셔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속상했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이 계속 자라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 걸까요?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해 가지는 오해 중 하나는, 기도란 ‘내 소원과 바램’을 아뢰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기도란 먼저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나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솔직하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 결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마치 자녀가 아빠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할 때, 아빠가 기쁨으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팔복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복이 바로 땅을 상속받는다는 세 번째 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같이 땅값과 아파트값이 고공행진을 하는 시대에, 땅을 상속받는다는 말은 누구나 귀가 번쩍 뜨일 일이지요. 하지만, 정말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까요?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난 자, 힘 있는 자, 부자가 아니라요? 온유한 자란 마음이 착한 자나 성격이 유순한 자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힘없는 자, 땅을 빼앗긴 자, 불이익을 당한 자를 말합니다. 온유하고 싶어서 온유한 게 아니라, 힘이 없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유해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약자들이 어떻게 땅을 상속받고,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가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힘없는 자, 땅을 빼앗긴 자, 권리가 짓밟히고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회복시켜 주시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향성’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힘있고 목소리 크고 높은 사람들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마5:3 팔복은 행복을 얻기 위한 조건이나, 따라야 할 윤리규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은 악한 세상의 질서를 거꾸로 뒤엎으시며, 모든 것을 바로잡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상을 근본에서부터 뒤집는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행동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혁명적인 변화 중 하나는 애통하며 슬퍼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슬퍼하는 자는 자신의 죄와 공동체의 죄 때문에 슬퍼할 수도 있고, 불의와 상실의 고통으로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엇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자들아, 너희가 복되다! 하나님의 위로가 지금 임하고 있다! 하나님이 너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시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슬픔을 불편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슬픔보다는 아무일 없는 척, 괜찮은 척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마5:3 페이스 북이나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대부분 행복하고, 아름답고, 유쾌하고, 즐겁고, 보기 좋은 모습들과 이야기들만 올라옵니다. 친구들의 그런 사진과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우울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소셜 미디어나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불행하고 박복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행도 못가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좋은 것들을 소유하거나 누리지도 못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좋은 직장, 좋은 간판도 가지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비싼 사교육을 시킬 형편도 안됩니다. 그런데도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한다는 걸까요? 아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 눅 4:1-2- 이 말씀은 우리의 통념과 다른 특이한 표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령 충만’한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충만하면 시험과 유혹도 비껴가고, 있던 시험도 물러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같이 달려들어’ 공격해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성령 충만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사단에게 시험받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연단해서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시험은 성령께서 우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