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성도들(특히, 젊은 세대들)의 예배 생활이 급속하게 바뀌는 것을 봅니다. 내 스타일과 취향에 맞는 설교를 TV나 온라인에서 쇼핑하는 관행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모든 교회가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면서 온라인 예배 쇼핑은 전세대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어느 교회 예배 영상을 보고, 다음 주는 다른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랜선 투어’ 정도는 애교입니다. 설교를 조금 듣다가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이 나오거나 조금이라도 지루하게 느껴지면 다른 교회 채널로 금방 갈아타는 ‘순간 이동'(?) 예배도 쉽게 가능해졌습니다. 내 취향에 맞는 설교 채널 몇 개를 모아서 돌려가며 듣는 ‘비빔밥'(?) 예배도 흔해진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정해 놓은 형식이 어디 있냐. 내가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를 찾아서 예배드리는 게 뭐가 문제냐. 오죽하면 그러겠냐’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예배 형식에 대해 정해 놓은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말씀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예배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부
코로나가 한창일 때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아니, 지금이 더욱) 우리가 유념해야 할 부분이라 다시 올립니다.(2023년 5월 24일) 일원동 가족들에게 코로사 사태 초기 부터 우리 교회는 최상의 방역조치와 예배 인원수 조절까지 하면서,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8월 중순이후 '주일예배'마저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별한 정성이 없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자가 아닌 소비자의 자리에 서게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의도치 않게, '왕'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앞에 '고객' 행세를 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희생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종교적인 컨텐츠를 소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는 무소부재의 교리를, 마치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 마음대로 호출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니 어디서든 내가 알아서 내 방식으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했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희생과 헌신이 결여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그건 예
이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가 중에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왜 저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할까요?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는 금방 잘 와 닿지 않는 가사이지요.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서, 우리 눈높이에 같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낮고 비천한 우리를 위해 땅 아래까지 자신을 낮추고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러하고,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본질이 원래 우리 수준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은 높고 높은 곳에 계신, 우리와 ‘급’이 완전 다른 분이십니다. 예배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저 위’를 지향해야 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이 높은 산 위에 있고, 성전 바깥뜰로 가는 층계가 7계단이며, 안뜰로 오르는 층계는 8계단이며, 내전까지는 또 12계단이나 더 올라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예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을 주께 올려드립니다!(라틴어 Sursum Corda)’ 라는
부활절은 전 세계가 함께 축하하며 가정과 교회, 거리와 광장에서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시즌이 다가오면 두 가지가 확연히 눈에 띠게 달라집니다. 첫번째, 마트 진열대의 색상이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상 위주로 바뀌고 부활절 계란을 장식할 수 있는 소품들과 파티 용품들이 엄청 쏟아져 나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의 옷차림이 확 바뀝니다. 그전까지 주로 칙칙하거나 어두운 색을 입던 사람들이 갑자기 밝은 핑크, 노랑, 흰색, 연두 등의 산뜻한 칼라의 옷들을 입습니다. 그래서 확연하게 계절이 바뀌고 봄이 왔다는 것, 부활절 시즌이 되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만 먹는 특별한 음식들도 있습니다. 주로 계란 요리가 많고, 십자가 모양으로 장식한 부활절 빵(Cross Burn)도 먹고, 이 시즌에 가장 맛있게 숙성하는 신선한 햄을 사서 부활절 만찬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거리에는 튤립과 벚꽃 등 아름다운 봄꽃들이 부활 시즌을 알려줍니다. 교회마다 화려한 오르간과 밴드에 맞추어 힘찬 부활 찬송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Christ is risen)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Christ is ris
어느 날 우리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걸 6살 딸이 들었나 봅니다. 얼마 후 딸아이가 엄마한테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엄마, 제가 보는 앞에서 아빠랑 말싸움하지 마세요! 아빠 말을 듣고 엄마가 양보해야죠. 그래도 이 집의 가장은 아빠잖아요.’ 엄마는 기가 막혀서 웃고, 저는 그냥 속으로만 웃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집사람은 딸아이 앞에서 저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딸은 엄마편이라는데 어떻게 6살 딸아이가 아빠 편을 들게 되었을까요? 물론, 저희 딸아이가 늘 제 편을 드는 건 아닙니다. 나름 예리한 정치적 판단력(?)을 가지고 공정하게 엄마 편을 들 때도 있습니다. 엄마가 아빠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 그만 마셔라, 운동해라, 라면 먹지 마라’ 잔소리하는 것은 아빠가 들어야 한다고 똑같이 잔소리를 합니다. 사실 딸아이의 말은 저희가 평소 아이에게 가정예배나 가족 대화 시간에 늘 들려주었던 말을 그대로 ‘미러링’(mirroring) 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딸아이에게 더 잘 반사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오늘날 뇌
코로나 사태 초기에 성도들에게 보냈던 목회서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그 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행한 우리의 예배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떤 중심으로 예배드려야 하는지는 동일합니다. 현장예배로 완전 전환을 하면서 다시 우리의 중심을 잡기 원합니다. --------------------------------------------------------------------------------------------------------------------------------- 일원동교회 성도님들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리더로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섬기는 인도자로서, 엄청난 마음의 짐과 부담을 가지고 이 글을 적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온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일예배가 행여 감염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연일 언론에서는 교회의 모임에 대해서 우려와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회집된 주일예배를 온라인예배 혹은 가정예배로 대치하고 있
젊은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망할 놈의 인스타’라는 표현을 가끔 듣습니다. 누가 어디서 핫하고 쿨한 경험을 했다는 자랑이 가득한 SNS 소식을 보면, 끊임없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국민 소득 3만불 시대에 접어들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요를 누리는 데 비해,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은 높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 풍성한 시대에 우리는 정작 감사를 잊고, 은혜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축제일인 장막절은 일곱째 달 티쉬리월 15일부터 시작되는 7일간의 대축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 달 1일의 나팔절(로쉬 하샤나, 새해 첫날)과 10일의 대속죄일(욤 키푸르), 그리고 장막절(숙곳)까지 큰 축제들이 몰려 있어 긴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일곱째 달은 오늘날의 달력으로 9월~10월에 해당되는데, 일년 중 가장 풍성하고 여유로울 때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이 때쯤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나고 휴식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가장 풍족하고 넉넉한 축제 기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회하고 금식하는 것
해마다 연초가 되면 많은 분들이 ‘성경 통독’을 해보겠노 결심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진도가 술술 잘 나갑니다. 대부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후반부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결심이 무너집니다. 결정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타이밍은 레위기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제사 목록, 절기 목록에 인내심을 잃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레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해도 민수기에서 또 복병이 기다립니다. 특히 민수기 7장처럼 똑같은 예물 목록이 무려 12번이 반복되면 거의 지뢰밭(?)을 만난 수준입니다. 어지간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아니면 제대로 읽어나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지루하고 긴 본문들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내심을 테스트하실까요? 어떤 때는 성경이 많은 사건을 놀라울 만큼 압축적으로 간략히 기록하면서, 어떤 때는 엄청난 디테일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대충 읽고 지나칠 부분이 아니다, 집중해서 디테일까지 살펴라,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숨은 의미까지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라,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속도를 중시합
고대 악기 중에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가 나팔입니다. 성경에는 나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나팔이 자주 언급됩니다. “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고전15:51). 왜 하필 나팔이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요? 그 나팔이 오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 답을 오늘 민수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개의 은나팔을 만들어서 제사장에게 불라고 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약속의 땅을 향한 행군을 지휘하는 현실적 목적입니다. 나팔을 크고 짧게 끊어서 불면 캠프를 걷고 행군을 시작하고, 나팔을 작게 불면 행군을 멈추고 캠프를 칩니다. 다시 말해, 이 나팔은 매일의 걸음을 인도하는 나팔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에 성회로 모을 때입니다. 이 때는 나팔을 크고 길게 붑니다. 이것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입니다. 성경공부 오프닝 시간에 청년들의 생각도 알고, 서로 마음도 열고 할 목적으로, 사소한 질문을 한 가지씩 던지는데, 그날 질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과연 있는가’ 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청년들이 의외로 ‘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를 들어 꼽는 사람이 축구선수 호날두였습니다. 당시 20대의 나이에 실력, 외모, 돈, 인기, 성공, 영향력, 열정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겁니다. 어떤 친구들은 저스틴 비버 같은 아이돌을 꼽기도 했습니다. 저스틴 비버는 16살에 데뷔해서 첫 앨범에서만 무려 7곡을 빌보드차트 핫100에 진입시킨 기록을 가진 가수입니다.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로 선정한 바 있고, 한해 2천만장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20대로 손꼽힌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피겨스타 김연아 같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꼽혔습니다. 꼭 이런 유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젊은 나이에 탁월한 성공을 거두거나, 실력과 재력에외모, 인성까지 다 갖춘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