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 가족들에게 코로사 사태 초기 부터 우리 교회는 최상의 방역조치와 예배 인원수 조절까지 하면서, 현장예배와 온라인 예배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8월 중순이후 '주일예배'마저 온라인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별한 정성이 없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자가 아닌 소비자의 자리에 서게 될 위험이 다분합니다. 의도치 않게, '왕'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앞에 '고객' 행세를 하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희생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종교적인 컨텐츠를 소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는 무소부재의 교리를, 마치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 마음대로 호출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니 어디서든 내가 알아서 내 방식으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했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희생과 헌신이 결여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중보자 그리스도의…
어느 날 우리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걸 6살 딸이 들었나 봅니다. 얼마 후 딸아이가 엄마한테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엄마, 제가 보는 앞에서 아빠랑 말싸움하지 마세요! 아빠 말을 듣고 엄마가 양보해야죠. 그래도 이 집의 가장은 아빠잖아요.’ 엄마는 기가 막혀서 웃고, 저는 그냥 속으로만 웃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집사람은 딸아이 앞에서 저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딸은 엄마편이라는데 어떻게 6살 딸아이가 아빠 편을 들게 되었을까요? 물론, 저희 딸아이가 늘 제 편을 드는 건 아닙니다. 나름 예리한 정치적 판단력(?)을 가지고 공정하게 엄마 편을 들 때도 있습니다. 엄마가 아빠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 그만 마셔라, 운동해라, 라면 먹지 마라’ 잔소리하는 것은 아빠가 들어야 한다고 똑같이 잔소리를 합니다. 사실 딸아이의 말은 저희가 평소 아이에게 가정예배나 가족 대화 시간에 늘 들려주었던 말을 그대로 ‘미러링’(mirroring) 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딸아이에게 더 잘 반사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오늘날 뇌
일원동교회 성도님들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리더로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섬기는 인도자로서, 엄청난 마음의 짐과 부담을 가지고 이 글을 적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온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일예배가 행여 감염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연일 언론에서는 교회의 모임에 대해서 우려와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회집된 주일예배를 온라인예배 혹은 가정예배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부득이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가정예배양식과 설교링크를 보내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존의 주일 예배 역시 그대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드리는 예배 세팅과 사이즈는 (대규모 회중이 함께 모이는) 중대형교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1부와 2부로 분산해서 드리는 예배 밀집도는 지금도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 북적이는 우리 동네 중소형마트나 지하철보다 더 낮습니다. 이런 셋팅의 예배조차 폐할 정도라면, 아예 직장출
젊은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망할 놈의 인스타’라는 표현을 가끔 듣습니다. 누가 어디서 핫하고 쿨한 경험을 했다는 자랑이 가득한 SNS 소식을 보면, 끊임없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국민 소득 3만불 시대에 접어들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요를 누리는 데 비해,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은 높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 풍성한 시대에 우리는 정작 감사를 잊고, 은혜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축제일인 장막절은 일곱째달 티쉬리월 15일부터 시작되는 7일간의 대축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 달 1일의 나팔절(로쉬 하샤나, 새해 첫날)과 10일의 대속죄일(욤 키푸르), 그리고 장막절(숙곳)까지 큰 축제들이 몰려 있어 긴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곱째달은 오늘날의 달력으로 9월~10월에 해당되는, 일년 중 가장 풍성하고 여유로울 때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이 때쯤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나고 휴식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장 풍족하고 넉넉한 축제 기간을 참회하고 금식하는…
이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가 중에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왜 저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할까요?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는 금방 잘 와 닿지 않는 가사이지요.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서, 우리 눈높이에 같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낮고 비천한 우리를 위해 땅 아래까지 자신을 낮추고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러하고,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본질이 원래 우리 수준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은 높고 높은 곳에 계신, 우리와 ‘급’이 완전 다른 분이십니다. 예배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저 위’를 지향해야 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이 높은 산 위에 있고, 성전 바깥뜰로 가는 층계가 7계단이며, 안뜰로 오르는 층계는 8계단이며, 내전까지는 또 12계단이나 더 올라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예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을 주께 올려드립니다!(라틴어 Sursum Corda)’ 라는
해마다 연초가 되면 많은 분들이 ‘성경 통독’을 해보겠노 결심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진도가 술술 잘 나갑니다. 대부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후반부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결심이 무너집니다. 결정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타이밍은 레위기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제사 목록, 절기 목록에 인내심을 잃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레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해도 민수기에서 또 복병이 기다립니다. 특히 민수기 7장처럼 똑같은 예물 목록이 무려 12번이 반복되면 거의 지뢰밭(?)을 만난 수준입니다. 어지간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아니면 제대로 읽어나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지루하고 긴 본문들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내심을 테스트하실까요? 어떤 때는 성경이 많은 사건을 놀라울 만큼 압축적으로 간략히 기록하면서, 어떤 때는 엄청난 디테일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대충 읽고 지나칠 부분이 아니다, 집중해서 디테일까지 살펴라,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숨은 의미까지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라,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속도를 중시합…
고대 악기 중에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가 나팔입니다. 성경에는 나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나팔이 자주 언급됩니다. “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고전15:51). 왜 하필 나팔이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요? 그 나팔이 오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 답을 오늘 민수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개의 은나팔을 만들어서 제사장에게 불라고 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약속의 땅을 향한 행군을 지휘하는 현실적 목적입니다. 나팔을 크고 짧게 끊어서 불면 캠프를 걷고 행군을 시작하고, 나팔을 작게 불면 행군을 멈추고 캠프를 칩니다. 다시 말해, 이 나팔은 매일의 걸음을 인도하는 나팔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에 성회로 모을 때입니다. 이 때는 나팔을 크고 길게 붑니다. 이것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입니다. 성경공부 오프닝 시간에 청년들의 생각도 알고, 서로 마음도 열고 할 목적으로, 사소한 질문을 한 가지씩 던지는데, 그날 질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과연 있는가’ 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청년들이 의외로 ‘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를 들어 꼽는 사람이 축구선수 호날두였습니다. 당시 20대의 나이에 실력, 외모, 돈, 인기, 성공, 영향력, 열정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겁니다. 어떤 친구들은 저스틴 비버 같은 아이돌을 꼽기도 했습니다. 저스틴 비버는 16살에 데뷔해서 첫 앨범에서만 무려 7곡을 빌보드차트 핫100에 진입시킨 기록을 가진 가수입니다.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로 선정한 바 있고, 한해 2천만장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20대로 손꼽힌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피겨스타 김연아 같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꼽혔습니다. 꼭 이런 유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젊은 나이에 탁월한 성공을 거두거나, 실력과 재력에외모, 인성까지 다 갖춘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면
얼마 전 새가족 청년과 세례교육을 할 때입니다. 첫 과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면서, 주위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말이, 자기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교회에 반감을 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뭔가 ‘트렌디하지’ 못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한 때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 가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시대가 엄청 급변하는구나 싶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나름 유행하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젊은 세대의 눈에는 어느새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융통성 없고, 촌스러운 곳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놀라운 융통성과 상황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들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답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다가갑니다. 그는 다양한 전략과 유연한 태도로 스스로를 청중들의 상황에 적응시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가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
큰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차를 태우고 가다보면 한국에서 가장 화려한 고층빌딩들과 백화점,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길에는 수입차들이 국산차보다 더 많이 보이고, 최첨단 유행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라 최근 유행 동향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사교육열풍의 진원지이인 학원 밀집 거리를 빠져나와 터널 하나를 지나면, 한적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다보면, 가끔 회의가 찾아옵니다. 학부모들에겐 학원 강사의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고, 최첨단을 달리는 물질문화 속에 교회는 빛바랜 골동품 같고, 극도로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지극히 요원한 꿈으로 느껴집니다. 왕위를 받으러 떠난 주인에게서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겁니다. 주위에는 온통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불신과 냉소의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주인이 맡겨준 ‘한 므나’는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라 이걸로 뭘 하나 위축되고, 위험부담도 너무 큽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은 그 ‘한 므나’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