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성도들(특히, 젊은 세대들)의 예배 생활이 급속하게 바뀌는 것을 봅니다. 내 스타일과 취향에 맞는 설교를 TV나 온라인에서 쇼핑하는 관행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모든 교회가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면서 온라인 예배 쇼핑은 전세대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어느 교회 예배 영상을 보고, 다음 주는 다른 유명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랜선 투어’ 정도는 애교입니다. 설교를 조금 듣다가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이 나오거나 조금이라도 지루하게 느껴지면 다른 교회 채널로 금방 갈아타는 ‘순간 이동'(?) 예배도 쉽게 가능해졌습니다. 내 취향에 맞는 설교 채널 몇 개를 모아서 돌려가며 듣는 ‘비빔밥'(?) 예배도 흔해진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정해 놓은 형식이 어디 있냐. 내가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를 찾아서 예배드리는 게 뭐가 문제냐. 오죽하면 그러겠냐’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예배 형식에 대해 정해 놓은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말씀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예배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부
젊은 세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망할 놈의 인스타’라는 표현을 가끔 듣습니다. 누가 어디서 핫하고 쿨한 경험을 했다는 자랑이 가득한 SNS 소식을 보면, 끊임없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국민 소득 3만불 시대에 접어들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요를 누리는 데 비해,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은 높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느 때보다 감사할 것이 풍성한 시대에 우리는 정작 감사를 잊고, 은혜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축제일인 장막절은 일곱째 달 티쉬리월 15일부터 시작되는 7일간의 대축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 달 1일의 나팔절(로쉬 하샤나, 새해 첫날)과 10일의 대속죄일(욤 키푸르), 그리고 장막절(숙곳)까지 큰 축제들이 몰려 있어 긴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일곱째 달은 오늘날의 달력으로 9월~10월에 해당되는데, 일년 중 가장 풍성하고 여유로울 때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이 때쯤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나고 휴식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가장 풍족하고 넉넉한 축제 기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회하고 금식하는 것
해마다 연초가 되면 많은 분들이 ‘성경 통독’을 해보겠노 결심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창세기, 출애굽기까지는 진도가 술술 잘 나갑니다. 대부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후반부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결심이 무너집니다. 결정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타이밍은 레위기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제사 목록, 절기 목록에 인내심을 잃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레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해도 민수기에서 또 복병이 기다립니다. 특히 민수기 7장처럼 똑같은 예물 목록이 무려 12번이 반복되면 거의 지뢰밭(?)을 만난 수준입니다. 어지간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아니면 제대로 읽어나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지루하고 긴 본문들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내심을 테스트하실까요? 어떤 때는 성경이 많은 사건을 놀라울 만큼 압축적으로 간략히 기록하면서, 어떤 때는 엄청난 디테일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대충 읽고 지나칠 부분이 아니다, 집중해서 디테일까지 살펴라,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숨은 의미까지 계속 묵상하고 생각하라,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속도를 중시합
얼마 전 새가족 청년과 세례교육을 할 때입니다. 첫 과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면서, 주위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말이, 자기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교회에 반감을 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뭔가 ‘트렌디하지’ 못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한 때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 가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시대가 엄청 급변하는구나 싶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나름 유행하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젊은 세대의 눈에는 어느새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융통성 없고, 촌스러운 곳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놀라운 융통성과 상황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들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답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다가갑니다. 그는 다양한 전략과 유연한 태도로 스스로를 청중들의 상황에 적응시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가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
큰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차를 태우고 가다보면 한국에서 가장 화려한 고층빌딩들과 백화점,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길에는 수입차들이 국산차보다 더 많이 보이고, 최첨단 유행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라 최근 유행 동향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사교육열풍의 진원지이인 학원 밀집 거리를 빠져나와 터널 하나를 지나면, 한적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다보면, 가끔 회의가 찾아옵니다. 학부모들에겐 학원 강사의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고, 최첨단을 달리는 물질문화 속에 교회는 빛바랜 골동품 같고, 극도로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지극히 요원한 꿈으로 느껴집니다. 왕위를 받으러 떠난 주인에게서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겁니다. 주위에는 온통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불신과 냉소의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주인이 맡겨준 ‘한 므나’는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라 이걸로 뭘 하나 위축되고, 위험부담도 너무 큽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은 그 ‘한 므나’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온
제가 아끼는 소중한 후배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이 친구는 청소년 시절 선교사로 헌신했고, 성경번역 선교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신대원을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사역자로서도 워낙 유능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 공부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앓고 있던 지병으로 갑작스레 천국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나’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렸던 아들을 뜻밖의 질병으로 고통 받게 하신 것으로 모자라, 꽃도 피우지 못한 채 데려가신 주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후배의 장례식에서 주신 말씀이 ‘부자와 나사로’ 본문이었습니다. 큰 은혜와 깨달음을 그때야 얻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며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 후배처럼, 나사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오직 주님만 의지했고, 주님의 복된 품에 안겼습니다. 후배가 아무것도 남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미술품은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입니다. 이 두 벽화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를 그린 것입니다. 왜 하필 소일까요? 수렵시대나 농경사회에서 소가 어마어마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천재화가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인류는 지난 2만년 동안 나아진 게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보면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크고 강력한 소의 이미지는 구석기인들의 마음뿐 아니라,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1세기 현대인들의 마음도 여전히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불안감을 떨치고자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춤추고 날뛰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모든 능력과 기사를 경험하고서도, 크신 하나님을 겨우 금송아지로 축소시켜 거기에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하고 좁고 한계가 많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크신 목적을 순종하고 인내하며 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패션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를 보면 소득수준이나 사회적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인만큼 옷에 대한 관심도 높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동네 마트나 집 앞 공원에만 나가도 후줄근하게 입고 나오는 사람이 없고, 다들 세련된 최신 유행 패션으로 무장(?)하고 나오는 것을 봅니다. 유행이나 세련됨보다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서구 사람들과 대조적인 편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도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대해 소재와 패턴, 디자인, 장식품 하나까지 세심하게 지적해 주십니다. 심지어 그 옷을 통해 제사장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존귀하고 명예롭게’하라는 패션철학(?)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패션까지 챙기시는 이유가 뭘까요? 제사장의 옷에 담긴 상징과 메시지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그가 입은 옷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 분의 존귀하심을 보여줍니다. 옷과 일이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중요한 요소는 ‘훈련(Discipline)’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끊임없이 훈계를 받고 자신을 훈련해서 계속 성장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훈계에 귀를 닫고 자신의 고집과 나쁜 습관을 방치해서 성장이 멈추고 퇴보합니다. 지혜의 길은 어렵고 자기를 꺽어야하고, 많은 인내가 필요하지만, 미련한 길은 노력할 필요 없이 그냥 내키는 대로 살면 됩니다. 하지만누가 굳이 어려운 길을 애써 찾아가려고 할까요? 지혜가 멀리 있지 않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훈련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힘든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훈련을 되도록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편한 길이란 없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라는 것을 인정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훈련의 과정을 즐겁게 잘 받을 것인가를 찾게 되니까요. “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15)”고 말씀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즐거운 마음이 있다면, 고되고 어려운 훈련도 축제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꼽히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연말연시 음악회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래퍼토리입니다. 연초에 유투브에서 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을 감상하는데, 아름답고 웅장한 “환희”의 노래 중 반복되는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Brüder, über'm Sternenzelt 형제여! 별이 반짝이는 저 높은 곳에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니... 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며 다난했던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의 희망을 다짐하는지, 이 가사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고 막막해도,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삶은 여전히 희망이 있고 기뻐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견고한 믿음과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왕의 마음도 수로의 물처럼 그 분의 뜻대로 움직이신다(21:1), 사람의 판단은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신다(2), 의로우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