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미술품은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입니다. 이 두 벽화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를 그린 것입니다. 왜 하필 소일까요? 수렵시대나 농경사회에서 소가 어마어마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천재화가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인류는 지난 2만년 동안 나아진 게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보면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크고 강력한 소의 이미지는 구석기인들의 마음뿐 아니라,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1세기 현대인들의 마음도 여전히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불안감을 떨치고자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춤추고 날뛰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모든 능력과 기사를 경험하고서도, 크신 하나님을 겨우 금송아지로 축소시켜 거기에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하고 좁고 한계가 많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크신 목적을 순종하고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우리의 자화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바로 금송아지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높은 영광을 향해 인내와 순종을 요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즉각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를 자신의 걸작품으로 빚기 위해 선한 열심을 다하시는 하나님보다, 내가 다급하고 불안할 때만 찾는 하나님은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금송아지를 크신 하나님과 바꾸고 있지 않습니까? 먹고 사느라 바빠서, 세상의 안락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멈춰 있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금송아지 앞에 멈춰 서서 만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금송아지에 만족한 결과는 쓰디쓴 맛과 고통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금송아지를 넘어 의롭고 보배로운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 분의 걸작품이 되라는 더 높은 부르심을 좇아가야 합니다. 금송아지에 자꾸 미련을 두면, 하나님은 내 안의 금송아지를 불태워 그 가루를 갈아마시게 하실지 모릅니다. 그렇게라도 금송아지를 넘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복이며, 회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QT묵상집 <복있는사람> 2018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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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Museo de Altamira y D. Rodríguez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