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가족 청년과 세례교육을 할 때입니다. 첫 과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면서, 주위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말이, 자기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교회에 반감을 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 뭔가 ‘트렌디하지’ 못한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한 때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 가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시대가 엄청 급변하는구나 싶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나름 유행하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젊은 세대의 눈에는 어느새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융통성 없고, 촌스러운 곳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놀라운 융통성과 상황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들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답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다가갑니다. 그는 다양한 전략과 유연한 태도로 스스로를 청중들의 상황에 적응시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가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
큰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차를 태우고 가다보면 한국에서 가장 화려한 고층빌딩들과 백화점,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됩니다. 길에는 수입차들이 국산차보다 더 많이 보이고, 최첨단 유행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곳이라 최근 유행 동향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사교육열풍의 진원지이인 학원 밀집 거리를 빠져나와 터널 하나를 지나면, 한적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다보면, 가끔 회의가 찾아옵니다. 학부모들에겐 학원 강사의 말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고, 최첨단을 달리는 물질문화 속에 교회는 빛바랜 골동품 같고, 극도로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지극히 요원한 꿈으로 느껴집니다. 왕위를 받으러 떠난 주인에게서 ‘한 므나’를 받은 종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겁니다. 주위에는 온통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불신과 냉소의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주인이 맡겨준 ‘한 므나’는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원이라 이걸로 뭘 하나 위축되고, 위험부담도 너무 큽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은 그 ‘한 므나’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온
유명한 승려 분에게 한 청년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이 해외의 가난한 나라에 봉사를 하러갔는데 아무도 자기 수고를 알아주지 않고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람도 못 느끼고 허탈해서 돌아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저도 청년들로부터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나 다문화가정 어린이 사역에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서 봉사하러 가면 종종 아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답니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봉사점수 따려고 왔죠?’ 아이들이 자기의 선의를 무시하는 거 같아 동기부여도 안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겁니다. 이런 질문에 그 스님은 뭐라고 답했을까요? ‘칭찬이나 감사와 같은 심리적 보상을 위해서 하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실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43절). 행동과 실천은 존재의 근원적인 상태, 즉 마음과 따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사실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문제는, 우
제가 아끼는 소중한 후배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이 친구는 청소년 시절 선교사로 헌신했고, 성경번역 선교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신대원을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사역자로서도 워낙 유능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 공부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앓고 있던 지병으로 갑작스레 천국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나’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드렸던 아들을 뜻밖의 질병으로 고통 받게 하신 것으로 모자라, 꽃도 피우지 못한 채 데려가신 주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후배의 장례식에서 주신 말씀이 ‘부자와 나사로’ 본문이었습니다. 큰 은혜와 깨달음을 그때야 얻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며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 후배처럼, 나사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오직 주님만 의지했고, 주님의 복된 품에 안겼습니다. 후배가 아무것도 남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미술품은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입니다. 이 두 벽화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를 그린 것입니다. 왜 하필 소일까요? 수렵시대나 농경사회에서 소가 어마어마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천재화가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고 “인류는 지난 2만년 동안 나아진 게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보면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크고 강력한 소의 이미지는 구석기인들의 마음뿐 아니라, 수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1세기 현대인들의 마음도 여전히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불안감을 떨치고자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춤추고 날뛰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모든 능력과 기사를 경험하고서도, 크신 하나님을 겨우 금송아지로 축소시켜 거기에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하고 좁고 한계가 많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크신 목적을 순종하고 인내하며 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패션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를 보면 소득수준이나 사회적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인만큼 옷에 대한 관심도 높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동네 마트나 집 앞 공원에만 나가도 후줄근하게 입고 나오는 사람이 없고, 다들 세련된 최신 유행 패션으로 무장(?)하고 나오는 것을 봅니다. 유행이나 세련됨보다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서구 사람들과 대조적인 편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도 패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대해 소재와 패턴, 디자인, 장식품 하나까지 세심하게 지적해 주십니다. 심지어 그 옷을 통해 제사장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존귀하고 명예롭게’하라는 패션철학(?)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패션까지 챙기시는 이유가 뭘까요? 제사장의 옷에 담긴 상징과 메시지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그가 입은 옷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 분의 존귀하심을 보여줍니다. 옷과 일이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의 진로를 계획할 때, ‘안정적인 직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의사, 법조인, 공무원, 교사, 대기업 등을 우선에 둡니다. 반면 자녀들이 원하는 직업군은 연예인, 스포츠선수가 1,2위를 차지합니다.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직업군이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이죠. 전문가들은 진로를 선택할 때, 자신이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뭘 잘하고 좋아하는가보다 뭐가 안정적인가를 생각하니까 현실적인 괴리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며 세상에 보내실 때, 제자들의 모든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주님의 권세(엑수시아)와 능력(두나미스)도 나눠주실 뿐 아니라, 먹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도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짐을 가볍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의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풍성히 먹이신다는 사실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이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꼽히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연말연시 음악회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래퍼토리입니다. 연초에 유투브에서 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을 감상하는데, 아름답고 웅장한 “환희”의 노래 중 반복되는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Brüder, über'm Sternenzelt 형제여! 별이 반짝이는 저 높은 곳에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니... 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며 다난했던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의 희망을 다짐하는지, 이 가사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고 막막해도,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삶은 여전히 희망이 있고 기뻐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견고한 믿음과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왕의 마음도 수로의 물처럼 그 분의 뜻대로 움직이신다(21:1), 사람의 판단은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신다(2), 의로우신 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반전’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사람들은 전형적인 인물 보다 ‘반전’있는 캐릭터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나오는 아라곤 같은 인물이 그렇습니다. 반지의 제왕 1편에서 아라곤이 처음 등장할 때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헷갈립니다. 얼마 후 좋은 사람인가보다 안심하게 되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주인공이라기보다 그저 조력자에 불과한 떠돌이 검객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라곤이 인간 왕의 마지막 후손인 것이 밝혀지고, 나중에는 악한 사우론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세계의 왕이 되는 인물로 전면에 그려집니다. 이런 부분만 놓고 봐도, 톨킨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 감탄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20세기의 톨킨보다 훨씬 오래 전 고대의 역사가인 누가가 얼마나 치밀하고도 탁월한 이야기꾼인지에 새삼 놀랍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떤 인물도 전형적인 인물이 없고, 이야기는 항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누가가 묘사하는 반전 있는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습
아일랜드 출신의 락그룹 U2의 리더 보노(Bono)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크리스천 신앙을 밝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인들의‘위선적’인 모습을 자주 비난합니다. 언젠가 보노가 신학자 유진 피터슨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노의 질문이, 왜 오늘날 교회가 부르는 노래들은 시편의 기도들처럼 진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수많은 애가와 탄식과, 절망의 노래들이 가득한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애가를 찾아보기도 어렵고, 현실에 대한 치열하고 정직한 고민이 담긴 노래를 듣기 어렵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절망의 노래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이 정의와 공의가 없어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는 것 같고, 사람들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정직과 성실과 정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이 도리어 손해를 보고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탄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어긋날 대로 어긋나 있습니다. 곰 같이 부르짖고 비둘기 같이 울면서 회복을 바라보지만 곪아져버린 내부에서 회복의 힘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이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일까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믿음일까요? 소위, ‘응답받는 믿음’,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하나님은 선하게 응답하시고, 불가능도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도 하인의 병이 낫는 ‘응답’을 분명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에 감동하시고, 놀라워하시며, 크게 칭찬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교에 호의적이었고, 상당한 물질적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장로들은 ‘ 이 사람은 다른 이방인들하고 다릅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받기 합당합니다‘라고 천거합니다. 하지만 백부장 자신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주님을 감히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며 주님의 방문을
언젠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이 ‘가벼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오래 동안 컨설팅 관련 분야에서 승승장구 해왔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의 강의와 조언에 감동을 받아 인생의 길을 새롭게 찾고, 수많은 조직들이 획기적인 전략수정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좌절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니, 약간은 의외였습니다. 더구나 그 분은 신앙심이 정말 깊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우울증 같은 건 모르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시편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도 한 때 모든 일이 형통하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깊은 수렁에 빠졌고, 영혼이 ‘죽음의 감옥’에 갇힌 듯한 어둠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과정 속에서 주옥같이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5,6)”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고통
1월6일은 교회력으로 주현절(Epiphany)이라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 주심을 기념하는 날인데, 서방교회에서는 특히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일을 기념합니다. 이전에 한 교회의 주현절 배너에 “Pursue something greater... like the Magi”(동방박사들처럼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하라!)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도 모르는 이방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자신의 욕심과 개인적 소망을 추구하며 살기 급급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들입니다. 그런 동방박사들이 왜 굳이 메시야를 찾아 멀고 힘든 여행길에 나섰을까요? 그들이 생존과 안정의 욕구를 뛰어넘는 더 높고 위대한 것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떤 더 높은 목표를 품고 추구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말씀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해서 그들을 움직여 갑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만남을 주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 만나주신다고 서운해 하기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숨바꼭질을 한다면, 숨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그 분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먼저 불러주셔야만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능숙한 어부가 그물망을 좁혀오는 것처럼, 주님은 주도면밀하게 베드로를 낚아(?)주십니다.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시고, 그의 배를 사용하도록 먼저 요청하시고, 그 배에 올라 말씀을 들려주시고, 전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해 낙심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의 상황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다가가, 결국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얻어냅
오래 전 페이스북에서 디즈니 청소 노동자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디즈니는 야간 주간 청소 스텝들을 단순히 ‘청소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디즈니의 모든 쇼를 연출하는 최고의 ‘무대 연출가’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디즈니를 찾는 고객들의 행복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하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도 세심하게 청소 하고,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주변을 깨끗이 치워주고 새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어 아이의 미소를 되찾아주는 역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오늘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을 짓는 사람들도 자신의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를 알고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장인들, 실을 뽑고 성막의 여러 재료를 만든 “마음이 슬기로운” 이름 없는 여인들, 귀한 보석과 재료들을 기쁨으로 드린 족장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성경이 인류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인물들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모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