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먼저 “나일”을 치셨는가?

출애굽기 7:14-25



Exodus Now and Then(6): 하나님은 왜 제일 먼저 "나일"을  치셨는가?

 

나일 강은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나일 강을 가장 먼저 치십니다. 왜일까요? 물론, 무엇보다 나일강이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하피(나일 강을 범람하게 하는 신)나 헤케트(개구리 머리를 한 풍요의 여신)와 같은 우상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이집트 우상들의 거짓됨을 하나씩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그 무엇보다, 나일을 가장 먼저 치신 이유는 나일이 바로 이집트의 교만과 자부심의 가장 큰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인들이 지금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콧방뀌를 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뭘 믿고 그토록 오만합니까? 바로 나일강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과 번영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나일강의 범람이 가져온 풍요로 인해 이집트에는 찬란한 고대문명이 발달하기도 했지만 그 문명의 그늘 뒤에 엄청난 교만과 강포함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파라오가 온 세상의 통치자라 자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약소민족을 노예로 부리고 학대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시기 위해 먼저, 이집트의 교만과 자부심의 근원을 무너뜨리시는 겁니다. 나일 강물이 피로 바뀌어 강 물을 마시지 못하고 또 거기서 악취가 나고 개구리가 올라오도록 해서,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나일강이 하루 아침에 혐오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풍요와 경제력을 더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안락함과 안전을 줄 것 같은 부동산과 돈, 나에게 좀 더 안전한 미래를 보장해 줄  같은 학벌과 간판을 의지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부심으로 삼거나, 부러워하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나일강에 닥친 재앙처럼 삶의 풍파와 위기가 불현듯 몰아닥칠 때, 평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믿고 의지할 게 못 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가 의지하는 나일은 무엇입니까? 자부심과 자랑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느 지역, 어느 아파트에 살고,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계층에 속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했고,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가 나의 나일은 아닙니까?  혹은 그런 것들을 부러워하고 좇아가기 급급해서 하나님을 저멀리 제쳐놓는 것이 오늘 우리의 우상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나일'을 가장 먼저 치심으로,  우리가 의지하는 그 모든 자부심과 '우상'의 거짓됨을 드러내는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시요, 유일하신 복의 근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분만이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혼돈의 물에서 풍요의 강들을 창조하실 수도 있고, 창조의 능력을 잠시 거두심으로 그 모든 것을 혼돈으로 되돌릴 수도 있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안전, 그 어떤 자부심의 근거보다, 오직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나일'이 한 순간 혼돈과 죽음의 물로 바뀔 때 혼돈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일'의 풍요와 자부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의 선물로 받아누리며, 그 은혜를 풍성히 나누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배준완 목사 (일원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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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마음, 생각, 힘을 다해 하나님 사랑하기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몸을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이 뒤틀리고 꼬이는 근본 원인은 바로 율법의 첫 번째 요구, 하나님 사랑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물론,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 마음과 힘과 뜻과 삶을 전부 드리는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못합니다. 아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의 풍요와 그것이 조장하는 탐욕의 문화는 모든 진정한 풍요와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려버립니다. 과학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법칙만으로 세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바람을 잡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