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 교회의 예배는 말씀의 예배와 더불어 성례의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설교는 들리는 말씀,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지만, 성례-성찬과 세례는 보이는 말씀으로서, 설교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중요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왜 성례가 중요할까요?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세례나 성찬을 그저 일년에 한두번 있는 형식적인 의례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례는 우리의 예배와 신앙의 기초를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이요, 상징이자, 그 자체가 강력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 분 안에 맺어진 언약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가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세례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언약의 피와 새롭게 창조하시는 세례의 물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성찬은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세대를 이어간다는 말이 요원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을 보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 합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그대로 답습하면서, 아버지가 남긴 은혜의 유산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아들의 모습이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의 일이 아닐까 염려 됩니다. 어쩌다 이스라엘의 ‘큰 용사’였던 기드온에게서 아비멜렉 같은 세대가 나왔을까요? 우리는 이 일을 교훈 삼아 어떻게 지혜롭게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할까요? 먼저, 우리 세대의 잘못이 다음 세대로 되물림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아들에게 물려준 악한 유산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을 넘어선 자기확신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전쟁에서 300명의 적은 숫자로 대승을 거둔 후 지나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두 왕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버젓이 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과 자기 확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지키지만, 자기 확신은 쉽게 그 선을 넘어
이전 대통령의 한 발언이 언론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고 했던 표현입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사용하기 과연 적절한 표현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오늘날 이런 식의 ‘뉴에이지적 영성’ 또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대중서적과 자기계발서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흥미롭게도오늘 드보라의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별들이 하늘에서 시스라와 맞서 싸웠고,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다는 표현입니다(20-21). 드보라는 이 구절에서 이 전쟁의 영적 차원을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을 도운 것일까요?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별들과 기손 강이 이스라엘군을 도왔던 이유는 드보라와 바락이 20년간 그들을 압제하던 가나안의 압제자 야빈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나서서 돕는 사람들은 간절히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을 온 우주와 천군천사들이 돕습니다. 그것이 하나
크리스마스 시즌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에서는 성탄절 전 4주간을 대림절/대강절(Advent)로 지키며, 왕이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대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과 13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로 다시 돌아갈 것을 약속하고 성도들에게 자신의 귀환을 준비하도록 권면합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 바울은 그가 돌아올 때 교회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유순하고 겸손한 태도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대적자들에게는 바울이 약하고 권위가 없다고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고, 일부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영혼을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권세를 다 쓰지 않고 온유하고 희생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올 때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을 엄중히 다루고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도의 다시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그 분은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Exodus Now and Then( 9) :구원의 식탁, 구원의 이야기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8.15광복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듯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만에 이집트를 탈출해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의 고된 노역도, 생존을 위협하는 파라오의 압제와 공포정치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민으로서, 자신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백성으로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식탁 자리입니다. 그 식탁 자리에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구원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줍니다. 매년 돌아오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구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형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숱한 민족적 고난을 견디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월절 이야기의 절정은 바로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첫 유월절 만찬이 시작된 그날 밤, 이집트에 죽음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사자를 보내이집트의
" 잠시 교회를 떠나 있을 때면, 고통 받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 - 본문 18p에서 -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교회를 다녀야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시간을 맞춰, 교통지옥을 뚫고 교회에 나가는 것만도 힘든데, 교회에 가면 왠지 불편하고 거슬리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때로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안 들고, 찬양은 촌스럽거나 너무 요란하게 느껴지고, 기도는 또 왜 그렇게 긴지, 일어났다 앉았다 의미도 모를 순서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왜 내가 바쁜 시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의문이 듭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에게 실망하고 관계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나 혼자 하나님 믿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자인 필립 얀시는 어린시절 근본주의적인 미국 남부 교회에서 자라났다가, 교회에 회의를 느끼고 오래동안 교회를 떠나 방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출애굽기(9): 하나님인가 나일인가 ❏ 마음열기 질문과 활동 1. 당신에게가장 소중한 보물 1호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 성경속으로 : 출 7:14-8:15 1. 파라오가 계속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떤 명령을 하십니까?(7:16-17) 2. 이집트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나일 강이 피로 변하자 어떻게 됩니까? (7:18,21) 3. 첫 번째 재앙에 파라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7:22-23) 4. 파라오가 계속 마음을 완악하게 할 때 하나님이 두 번째 내리신 재앙이 무엇입니까? (8:2-4) 5. 두 번째 재앙에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첫 번째 재앙 때와 어떻게 다릅니까?(8:8) 6. 그럼에도 파라오의 마음이 다시 완고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8:7,15) ❏ 더 깊이 생각하기 7. 하나님은 왜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에게 풍요의 상징이자,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나일 강을 치셨을까요? (참고, 이사야 44:6, 8-11) ❏ 적용과 마무리 활동 8. 당신에게풍요와 자부심의 상징인 ‘나일’은 무엇입니까? 외모입니까? 성적입니까? 재능입니까? 세상적인지
Exodus Now and Then(8): 강자와 약자 인간은 누구나 상처와 연약함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상처와 열등감으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지냅니다. 또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온갖 가면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급급합니다. 모세 역시 젊은 시절의 실패와 상처로 내면에 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야의 도망자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름 받았지만 여전히 상처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파라오 앞에 서는 것이 두렵고 말재주가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하나님은 아론을 붙여주셔서 약점을 보완하게 하시고, 함께 말씀을 받아 사명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열재앙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모세가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세 번의 재앙은 모세와 아론이 함께 일으켰고,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의 직접적 역할이 점점 많아집니다. 일곱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의 지팡이가 이적을 일으키고, 여덟 번째 재앙부터는 모세가 지팡이도 필요 없이 하늘
Exodus Now & Then (7): Your God is too small!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겨우 내가 급할 때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 그저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 정도는 아닌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작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하나님은 마법 램프의 요정 지니(Gini) 같은 그 정도의 존재가아닙니다. 교회 안에만 갇혀 있고, 종교 영역에서만 힘 좀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과학, 경제, 예술, 정치, 사회과학에서는 전혀 힘 못 쓰는 그런 작은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고, 하나님의 영역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축소시킵니다. 종교에서의 하나님, 나에게 심리적 위안과 평안을 주는 하나님은 믿지만, 학교와전공 속에서, 직장에서, 일터와 사회생활에서, 국제정치와 외교 부분에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런 공적인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무능하시거나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있는 것 같지만, 당장 교회 문 앞 열발자국만 나가도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살아갑니다. 어디가서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티내다가 나만 왕따 당하
출애굽기(1)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들 ❏ 마음열기 질문과 활동 1. 우리 교회 사람들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서로의 이름과 간단한 특징을 말해보거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소개를 해 봅시다) ❏ 성경속으로 : 출1:1-21 2. 야곱(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떤 계기로 이집트에 오게 되었습니까?(출1:1-3, 창세기45:9-11, 46:5-6) 3. 이집트 왕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학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1:8-11) 4.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학대받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창12:2-3, 15:13, 46:33-34 참조) 5.노역과 학대에 시달리는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번성하여 숫자가 많아지고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1:7,12,20절). 이것은 무엇을 상기시켜 줍니까?(창12:2, 15:5, 46:2-3 참조) 6.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파라오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살렸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15-17) 하나님은 그 산파들의 믿음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20-21) ❏ 더 깊이 생각하기 7.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파라
선교학에서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이 있습니다.하나님이 보내시는 선교라는 뜻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고, 다시 예배의 자리에서 세상으로 보내셔서,열방이 주님께 돌아와 예배하도록 하십니다.선교와 예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며,선교는 항상 예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안디옥 교회가 기도하고 금식할 때 주님의 말씀을 받아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언젠가 한 선교사 친구로부터 한국 선교사들은 기도와 열정에서는 강점을 보이지만, 팀워크가 약하고 연차가 오래될수록 에너지가 고갈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약점들을 보완하고 향후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의 주도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의 패러다임이 예배 공동체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받아 열방을 향해 함께 나아갈 때선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팀웍크의 문제, 영적 탈진의 문제가 비로소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교는 먼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행1:8) 지금 한국에는 멀리 선교지로 가기 전에, 자기 발로 찾아오는 수많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둑’이 무너져 급속도로 나라가 기우는 시점이 보입니다. 바로 여로보암 2세 이후, 스가랴가 왕이 된 때입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왕들이 연거푸 모반을 당해 죽고, 짧은 시기에 왕조가 바뀌고, 외부 침략이 거세지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합니다. 이 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주었던 ‘은혜의 둑’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첫 번째 은혜의 둑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예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 은혜의 둑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켜준 최고의 방어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죽고, 예후 왕조가 4대간 이어지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여로보암 2세로 유효기간이 다 끝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버티게 해 줄 ‘은혜의 둑’이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은혜의 둑을 다시 쌓아야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중흥기 때에 하나님이 아모스, 호세아, 요나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경고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굳
열왕기서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단연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에, 그토록 위대한 선지자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단 한 번도 다윗과 견줄만한 선한 왕의 통치가 없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마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죽은 후, 여로보암 2세 시대 북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강성한 중흥기를 맞이한 것은 그 이전 엘리야와 엘리사가 일으킨 영적 부흥의 열매입니다. 엘리사가 죽을 때, 요아스가 울면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한 것은 참으로 진실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살아있는 동안에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버렸을 때, 시체가 회생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영적으로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던져 버리기를 즐겨 하지 않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엘리사와 같은 인물이 존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지난 15년 정도 청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낙심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가르쳐도, 잠간 돌아서면 배신하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무나 자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렇게 열매도 별로 보이지 않는 일에 제 인생을 허비하라고 저를 부르셨습니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확실한”(?) 응답을 안 주십니다. 아니, 제가 기대하는 “강한 바람 같고 지진 같고 불같은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미한 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세워 이스라엘의 영적인 암흑기를 뚫고 나갈 믿음의 세대를 일으킨 것처럼,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는 일을 지속하라”는 그 음성 말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중에 하나님께 세 가지 사명을 받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자신의 선지자직을 계승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자신의 시대에 엘리사를 선
우리 시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사는데, 정작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어려움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채 그저 여가활동의 일부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극단까지는 가지는 않아도,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고난이 있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굳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뭔가’라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이런 회의적 시각에서 욥을 본다면, 욥은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켜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욥의 부인이 악하게 쏟아낸 말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그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그의 기도에 귀를 닫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킵니다. 항변하고, 불평하고, 자신의 결백과 불의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혜이며